구암서원 배향인물
서침(徐沉, 1360년경~) 구계선생

- 중심재

- 구계공 묘소
휘는 沉(침), 자는 聖黙(성묵), 호는 龜溪(구계). 고조는 고려 판도판서 달성군 諱(휘)晉(진), 증조의 諱(휘)는 奇俊(기준) 도관좌랑증 문하시중찬성사 달천군, 조의 諱(휘)는 潁(영) 호는 노남 諡(시)는 충정 문하시중 찬성사 달성군, 고의 諱(휘)는 鈞衡(균형) 호는 학암 諡(시)는 정평, 정포은과 동방급제, 좌명공신 정당문학 문하시중찬성사 세자사부, 비는 광산군부인 김씨였다. 선생은 나면서부터 영혜하고 관인후덕 하였으며, 포은선생에게 성리학을 배웠고, 후에 조봉대부 전의소감을 거쳐 통정대부 전라처치사를 역임하였고, 세종조에 덕망으로 삼남균전제처사를 지냈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 사가선생

- 사가선생 묘소

- 염수재
세종 2년(1420)~성종 19년(1488) 諱(휘)는 居正(거정), 자는 剛仲(강중), 호는 사가정. 목사 미성의 아들, 권근의 외손, 세종 26년(1444)에 식년문과하고, 세조 2년(1456)에 문과중시에 급제, 이듬해 문신중시에 장원, 세조 6년에 사은사로 입명(入明)하여 그 곳 학자들과 문장 및 시를 논하여 행동의 기재란 찬사를 받았다.
귀국 후 대사헌이 되고, 세조 10년(1464)에 조선조 최초의 양관대제학이 되었다. 세조 12년(1466)에 발영시에 장원, 그 뒤 육조의 판서를 두루 지내고, 성종 1년(1470)에 좌찬성, 이듬 해 좌리공신 3등으로 달성군에 봉해졌다.
서해(徐嶰, 1537~1559) 함재선생

- 함재선생 묘소

- 함재선생 친필
중종 32년(1537)~명종 14년(1559) 諱(휘)는 嶰(해), 자는 挺之(정지), 호는 涵齋(함재), 예조참의 固(고)의 아들, 퇴계문인, 증영상, 천품이 영민하여 일찍부터 성리학을 연구함으로써 약관에 문장과 학문이 높았기에 사림의 존경을 받았으나, 오래 사시지를 못하였다.
서사원(徐思遠, 1550~1615) 낙재선생

- 이강서원

- 금호선사선유도
자는 行甫(행보), 諱(휘)는 사원(思遠), 호는 樂齋(낙재), 諡(시)는 文康(문강) 이다. 遺逸(유일)로써 벼슬이 현감에 이르렀고 선생은 父(부) 진사공 徐 泂(서 형)의 명을 받들어 蔡應麟(채응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글을 외우고 익힘이 총명하고 사장의 아름다움이 빼어나 날로 칭송이 더하였으며 관년이 되어서 사서에 익숙하고 시문에도 능하였다. 선생은 명종5년(1550)에 팔거현 외가에서 나시어 광해7년(1615)에 별세한 학자이고, 의병장이며 평생 교화, 덕행, 효행으로 달성십현의 한분이시다. 본관은 달성이요, 洽(흡)의 아들이며 達城君(달성군) 穎(영)의 후손으로 7세때 백부인 진사 蓮亭(연정)선생 徐 泂(서 형)에게 입양하였으며 그 뒤 鄭逑(정구), 金宇顒(김우옹), 선생의 사우이다.
서성(徐渻, 1558~1631) 약봉선생

- 약봉선생 묘소

- 소호헌
명종 13년(1558)~인조 9년(1631) 諱(휘)는 渻(성), 자는 玄紀(현기), 호는 약봉, 명종 13년 5월 19일에 안동일직면 소호리 외가에서 함재공 해의 아들로 태어났다. 李珥(이이)와 宋翼弼(송익필)의 문인, 선조 19년(1586) 문과, 임란때, 호소사 황정욱의 종사관이 되어 함북에 이르러 정욱 등이 두 왕자와 함께 포로가 될 때, 홀로 탈출하였다. 왕의 명령으로 행재소에 이르러 명장 유정을 접대하였고, 그 뒤 암행어사로서 삼남을 순찰하고 돌아와 제용감정에 특진되고 밖으로는 경상도, 강원도, 함경도, 평안도, 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하였고, 형·병·호·공 등 4조판서와 의정부참찬과 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이른바 고명 7신의 한분으로 선조의 유명을 받은 중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