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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골 소개 350년 전통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도심 속 예절학교

달성서씨의 오랜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살아 숨 쉬는 서당골

연암산 기슭에 위치한 서당골에서는
덕망이 높은 선비나 유림은 물론
가르침을 얻고자 하는 학동들의 모임터였습니다.

연암산 서당골의 유래
연암산은 북쪽으로 팔공산 정기를 등에 업고 남쪽 정면은 대구를 대표하는 해발 660미터의 대덕산(앞산)을 마주하고 있다. 대덕산 줄기는 상동을 거쳐 수성구를 감싸고 동구의 만촌 일대와 큰고개를 거쳐, 경북대학교와 경북도청의 구릉까지 맥을 잇는다. 예로부터 한 마리의 거대한 용이 틀어 누운 연암산 용맥은 대구의 동북줄기를 따라 몸통을 가장 높이 치켜든 용미가 되며, 현재 대구시청 별관이 들어선 구 경북도청 앞의 용두가 연암산 자락의 서당골을 들어서는 관문이다.
연암산의 지명은 금호강과 연결되는 서편 절벽바위에 희망의 소식을 전하는 제비들이 집을 지어 많이 살았고, 제비가 둥지를 틀고 앉은 절벽 곳곳의 모습도 마치 제비처럼 보인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62년 동편의 산자락 일대에서 발굴된 선사시대 유적은 주로 민무늬토기, 홈자귀, 반달형돌칼, 점토대토기, 소뿔모양의 손잡이 토기 등이었는데, 특히 홈자귀는 완성품과 함께 원석과 미완의 조각 등을 합친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따라서 연암산 일대는 구석기 시대부터 인류의 조상들이 생활하면서 홈자귀의 제조장이 있던 곳으로 고증하고 있다.
1940년대 대구부의 수도국과 정수장, 산격배수지가 위치하면서 수도산으로도 불리며, 1996년 남쪽 중심의 기슭에 덕망이 높은 선현을 배향한 구암서원의 숭현사(대구문화재자료 제2호)가 소중한 문화재로 자리하게 되어 더욱 명성을 얻게 되었다.

서당골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지방호족으로 달성(달성공원)에 세거하였던 달성서씨의 집성촌이었으며, 골 입구에서 언덕배기까지 약300~500m 가량 되었으며, 150m~200m쯤에 서당이 2개(용담재, 일신재) 위치하고 있었다. 재는 공부를 하는 곳으로 옛날에는 글방, 요즘은 서당이라 주로 일컫는다. 용담재와 일신재는 임진왜란(1592-1598) 당시 정식으로 공부를 하는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이재(怡齋) 서사진(徐思進)선생이 임란이 끝난 후 이곳에 서당을 열었다. 그리고 서당은 야학당(주·야간)으로도 활용되었다. 근간 100년 전후에 서당 골목이 좁고 길어 ‘서당골’을 처음에는 한자로 ‘서당곡(書堂谷)’이라 불렀다. 당시 서당골에서는 덕망이 높은 선비나 유림은 물론 가르침을 얻고자 하는 학동들의 발길이 늘 끊이질 않았다.마을 여러 곳에서 체화당, 일신재, 용담재 등의 강학소와 서당이 많이 있었던 곳이라 서당골이라는 지명에도 매우 익숙하다.
용담재

임진왜란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한
이재 서사진의 충절을 기린 곳

용담재는 임진왜란 당시 영남 일대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한 이재 서사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문중에서 건립한 문화유적이며, 대구광역시 북구 연암공원로26길 26번지에 위치한다. 1650년 건립 당시에는 이재공이 배움을 원하는 지역의 학동들과 선비들의 학풍 조성을 위해 강학소로 세운 건물이다.

1888년에 노후화로 인하여 중수하였으며, 가구는 삼령 홀처마네 칸의 맞배지붕으로 건립되었다. 처음 건립할 당시에는 산격동 경북도청이 있던 터의 서편에 접한 낮은 절벽 아래에 세웠으나, 1976년 경상북도 청사의 확장으로 인하여 부득이 서북쪽으로 1km정도 떨어진 문중의 터에 사용하던 목재나 기와 등을 그대로 옮겨와 이건하게 되었다. 용담재가 이전되기 전까지 인접한 위치에 일신재라는 건축물 또한 서당의 기능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터라, 당시 사람들은 용담재를 '윗서당', 일신재를 '아랫서당'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효자각

연암산 줄기 언덕에 위치한
효행을 기리는 효자각

서명보(1704~1778) 효자각은 용담재에서 북쪽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정려각이다. 연암산 줄기 언덕에 세운 것으로 조선 숙종 때의 이름난 효자 서명보의 효행을 알리기 위한 단칸 맞배지붕의 비각이다.

공이 7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되자 어른도 힘든 상주의 일을 치르고, 이후 아버지마저 병으로 눕게 되자 농사와 땔감으로 약을 지어 드렸으며, 아내 역시 밤을 새운 길쌈과 바느질로 시아버지의 약값을 보탰다. 전국의 산천과 시장 등을 두루 다니며 필요한 약재를 직접 구하였고, 24년간 아버지의 병을 보살피는 동안 빠짐없이 일기로 남긴 '시탕록'은 임금까지도 감동하기에 이르렀다. 시탕록에는 아버지께 드린 약의 종류, 아버지의 안색, 기침소리는 물론 대소변의 상태까지 매우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1802년(순조 2년)에 영남을 순찰하던 암행어사가 소문대로 시탕록을 확인하게 되었고, 그 효행에 대한 품신으로 '좌랑공명보효자비'를 세웠으며, 1841년에 조정에서 정려를 내리고 공을 공조좌랑에 증직하였다.

서명보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었으며 인근에 용담재라는 강학소를 세운 이재공 서사진의 5세손이며, 효자각은 현재 후손들이 관리를 맡고 있다.
체화당

재사, 강학소, 향소 등으로 널리 활용되었던
문중회합의 장소

임진왜란 때 여러 친인척들과 산격동 서당골에 세거하면서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이재 서사진의 다섯 아들 중 성은공 신, 남계공 율, 농포공 업 등 삼형제가 지극한 효심으로 선조의 덕을 기리는 재사로 처음 지은 건물이다.

아들 삼형제의 아버지 사진을 임란 때 대구도호부 지역에서 선조의 전지(임금의 명령서)를 받고, 지방 유현과 유학을 중심으로 향병(지역의 의병)을 일으켜 크게 공을 세운 낙재공 서사원의 종제이다.

임진년(1592년)7월 29일 향병대장의 자격으로 작성한 낙재공의 소집향병통문과, 같은 해 7월 6일에 이미 작성된 향병장 유사(지역의 관리책임자) 분정기에 의하면, 이재공은 당시 대구도호부 지역의 읍내 북산리장의 유사로 임명되어 많은 공을 세웠다. 체화당을 지은 형제는 원래 다섯 형제였으나 둘째 각은 종숙부 사달의 양자로, 넷째 등은 다른 종숙부 동고공 사선에게 일찍이 양자로 입적되었다. 낙제공은 일찍이 한강 정구, 여헌 장현광과 함께 영남삼현에 속했으며, 동고공 또한 달성십칠현에 속한 인물이다. 약 350년 전에 원래 사진의 첫째 아들이 지은 종당과 둘째 아들이 지은 정사가 따로 건립되었으나, 1959년 5월에 두형제의 종당과 정사를 합하여 정사가 있던 자리에 기와로 중수하면서 현판을 걸었다. 현판처럼 당시 뜰에 옮겨 심은 앵두나무 열매와 꽃은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고 전하나 지금은 다른 수목들이 자라고 있다.

일자형 5칸 겹처마의 기와집은 박공지붕의 형태로 지어져 재사, 강학소, 향소 등으로 널리 활용되었으나, 오늘에는 지역 유림이나 문중의 회합장소로 많이 이용되는 곳이다. 중수할 때 기와 담장까지 새로 쌓았으며, 학동들이 드나드는 솟을대문을 화악문으로 이름을 정한 것도 후학에 대한 애착을 고스란히 담은 것이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다시 건물이 낡게 되어, 2016년 문중에서 내부 보수와 지붕 전체를 새로 교체하였다.